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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말/생각들

기획

글을 쓰겠다고 시작하고 데드라인이 닥쳐서야 어디에 쓸 지 도구를 정하고 글쓰기 폴더를 만들었다. 마감 한 시간 전에. 와중에 배는 너무 고파서 오른쪽에는 간단한 식사를 급하게 차려놓았다. 식사는 낫또와 조미김이다. 빨리 먹고 싶어서 얼려놓은 낫또를 밥그릇에 넣고 밥을 덮은 후에 밥통에 넣어놨다가 꺼냈다. 낫또에 소스를 섞어야하니까 밥을 반찬 그릇에 분리하고 밥풀이 섞인 낫또에 소스를 비벼 반찬 그릇에 밥을 덜어놓고 숟가락에 이 둘과 김을 함께 얹어 먹게 될 예정이다. 한 숟가락을 들고 어느새 묻은 밥풀인지 소스 때문인지 구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맥북 프로 키보드 위가 기름과 끈적임으로 더러워졌다. 하지만 매 순간 애지중지하던 마음은 어디가고 닦으면 되는 대수롭지 않은 순간이다. 미룰대로 미뤄놓고 데드라인은 지키고자 하는 마음에 젓가락이 테이블 아래로 떨어지는 것도 지금 당장만큼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데드라인보다 더 중요하고 문제가 되는 것이 있다. 글은 너무나도 잘 쓰고 싶고 가능하면 책을 내고 싶다는 욕심이다. 이 잘하고 싶은 마음은 나를 더 멍청하게 만드는데, 혹여나 글을 잘 쓰는 방법을 안다고 하더라도 습관과 강박에서 벗어나지는 못해서 한 문장 한 문장을 쓸 때마다 완벽하게 만들고 넘어가는 것이다. 1분 동안 한 문장을 붙잡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이 세계 안에서 내가 위치한 상황과 지점을 우습게도 깨치게 되면 일단 사전에 목표하지 않는 글자 수를 나도 모르는 누군가의 주제를 따라 흐름에 맡겨 늘려나가기 시작한다. 어디서 끝날지 모르겠어서 데드라인을 지킬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저 달려가고, 확실히 아는 것은 경험상 데드라인 1초 직전에 마감이라는 성공을 이루거나 1분이라는 시간을 넘겨 아웃이 되는 내가 선택할 수 없는 두 가지 옵션이 있다는 것이다.

 

시간을 보니 초안으로 이 단락에 이르기까지 10분이 소요되었다. 10분 안에 지금까지 살아온 나라는 인물의 특성의 반이 설명되었다. 아, 10분이 소요되었다는 알아차림과 정확한 계산은 나랑 어울리지 않는다. 글을 쓸 때는 유독 정갈해지고 싶은 마음에 하지 않는 짓을 글에 담을 때가 있다. 나라는 인물에서 조금 떨어진 행동과 생각들이 글이 아닌 다양한 상황과 분야에서 표현되기를 바란다. 표현이라는 말을 쓰기에는 표현될 수 있는 자원이 애초에 없어서 '창조하거나 없는 것을 가져와 쑤셔 넣는다'라는 표현이 더 맞을 수도 있겠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가 하면, 나는 계속해서 세상 안에서 이것과 저것과 구분하고, 판단한다. '내'가 된 이 사람은 좋을 수도 있지만 그닥 맘에 들지 않는 비교하고 자꾸 무언가가 되고 싶어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 제 3자의 입장에서 볼 때,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을 나눌 수 없는 것들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다. 하지만 나를 비교기준으로 바라봤을 때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나는 A형 인물이 되고 다른 이는 B형 인물이 된다. 하지만 10분으로 '나'라는 사람이 전부 설명될 수는 없을 거다. 이 표면 아래에 혹은 옆에, 위에, 대각선으로 많은 이야기들이 숨어있을 것이다. 아시다시피 이건 나 뿐만아니라 B형 인물에게도, C형 인물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 단편적인 인물에 대해서 조금 더 들여다 보고자 한다. 여기에는 약간의 두려움과 큰 편안함이 있다. 위에서 말했듯이 나는 계속 점검하고 비교하고 판단하려고 하는 사람이다. 이 죄는 오롯이 나에게 돌아오고 감내하며 괜히 힘들게 산다. 수 만번 돌아본 재미없는 개인의 이야기이다. 사회의 이야기라고 해도 사회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꺼낸 에세이가 얼마나 많은가. 나는 더 이상 그것들을 읽지 않는다. 읽지 않아도 어떤 이야기인지 알 것 같다고 오만하게 구는 헛된 나이를 갖고 있다. 그래서 인기를 얻고 싶은 목표를 빗겨나가는 설정을 하며 독자의 흥미를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컨텐츠를 만드는 것이 두렵고, 과거 얘기를 자꾸 끌어올리는 어떤 어른들처럼 가장 쉬운 말들을 풀어내는 일이라 이 글쓰기 주제는 나에게는 아주 편안하다.

 

이렇게 뒤늦게, 결국 편안한 길을 선택한다. 얼마마한 세월동안 늘 두려움이 이겼는지 수만번 돌아보면서 개편되고, 연구되고, 발전한 이야기들이 아직까지 한번도 쓰이지 않았다. 또 이렇게 돌아보는 이유는 글쓰는 많은 사람들이 늘 이야기했던 이유처럼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 많이 생산된 이야기들 안에 신선하지 않은 똑같은 것을 더하는 일은 살면서 가장 하고 싶지 않은 짓인데 새롭게 무언가를 생산해보자고 결정한 '쓰기'의 시작이 이렇게 되어버렸다. 이 앞 문장의 생각도 얼마나 많이 했는지 글로 남기고 있는 내가 할머니가 된 기분이다. 좀 더 젊어지기 위해서 이제라도 쓰는 것이라고 위안을 삼아보려고 한다. 살면서 누구든 경험하는 시기, 관계, 상황, 감정들 속에서 공통된 나의 혹은 너의, 우리의 이야기가 흘러 나올 것이다. 위에 서술한 10분동안의 인물을 읽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많겠지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계속 궁금해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글을 잘 읽지는 않지만 얼굴과 말을 통해서 궁금해하고 사람들을 이해하고 읽어내고 싶어하는 나처럼. 

 

내 오른쪽에 밥이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어버렸다. 밥은 차가워졌지만 이 순간만큼은 따뜻한 밥을 먹는 것보다 내 글을 읽는 사람이 재밌게 읽을 수 있는 글을 짓고 싶다. 큰 욕심이지만 나를 읽지 않는 사람들과의 코드도 찾아나서고 싶다. 이 시작이 누구도 더 낫고, 못난 사람을 만들지 않으면서 더 나은 나를 만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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